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발해 건국과 멸망: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의 흥망성쇠

역사

by mister 2025. 4. 4. 00:53

본문

728x90

발해 건국과 멸망: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의 흥망성쇠

 

우리 역사에서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나라, 발해.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을 중심으로 세워져 약 228년간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발해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흥미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특히 발해의 건국 과정과 갑작스러운 멸망은 드라마틱한 서사를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합니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의 건국부터 예기치 못한 발해 멸망까지, 그 흥망성쇠의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발해 건국: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다 (대조영과 동모산)

 

발해 건국의 씨앗은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서 뿌려졌습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무너지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여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 중 현재 중국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 지역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696년, 영주 지역에서 거란족의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나라의 폭정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자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 기회를 틈타,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일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당나라는 즉시 추격군을 보냈지만, 대조영은 험준한 *천문령(天門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며 위기를 벗어납니다.

 

마침내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 기슭(현재 중국 지린성 돈화시 일대)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우니,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震 또는 振)*이라 칭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책봉을 받으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로 바꾸게 됩니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그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발해 건국은 단순한 국가 건설을 넘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고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염원이 담긴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해동성국 발해: 황금기를 누리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 대무예는 적극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나라와 대립하며 흑수말갈 등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고, 심지어 732년에는 장문휴(張文休) 장군을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3대 문왕(文王) 대흠무 시기에 발해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문왕은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를 여러 차례 옮기며(중경 현덕부 → 상경 용천부 → 동경 용원부) 국가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특히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본떠 만든 계획도시로, 그 규모와 정연함은 발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 발해는 남쪽의 신라와는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교류했으며, 바다 건너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넓은 영토, 안정된 통치 체제, 찬란한 문화(고구려 문화 기반 위에 당, 말갈 문화 융합)를 바탕으로 발해는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국제적으로 위상을 인정받았습니다. 불교 문화가 융성했으며, 온돌과 같은 고구려의 생활 문화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발해의 황금기는 우리 역사에서 북방을 호령했던 강력한 국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728x90

 

발해 멸망: 갑작스러운 몰락과 남겨진 의문들

 

200년 넘게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발해는 10세기 초,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진 사이, 북방 초원에서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이끄는 *거란(契丹)*족이 세력을 급격히 키우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916년 요(遼)나라를 건국하고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며 강력한 군사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거란의 팽창은 발해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신라, 후백제, 고려 등 한반도 국가들과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925년 12월,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침공했습니다.

 

놀랍게도 강력했던 해동성국 발해는 거란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거란군이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한 지 불과 며칠 만인 926년 1월,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대인선(大諲譔)은 항복하고 맙니다. 건국 후 228년 만의 허무한 발해 멸망이었습니다.

발해의 갑작스러운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728x90

 

  1. 내부 분열: 지배층(왕족, 귀족) 간의 권력 다툼과 갈등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는 설입니다. 특히 말기에는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져 왕권이 불안정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2.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통일된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기동력을 가진 거란의 급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입니다.
  3. 백두산 화산 폭발설: 9세기~10세기경 있었던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 폭발이 발해 사회 전반에 큰 혼란과 타격을 주어 국력을 쇠퇴시켰다는 설입니다. 이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으로 논의됩니다.
  4. 지배층과 피지배층(말갈족)의 갈등: 고구려계 지배층과 다수의 말갈족 피지배층 간의 민족적 갈등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결속력을 약화시켰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떤 단일한 원인보다는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발해가 갑작스럽게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의 북방 개척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여기고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발해 역사의 중요성과 현대적 의미

 

발해의 건국과 멸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이며, 한국사의 범위를 북방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특히 최근 동북공정 등 주변국의 역사 왜곡 시도가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고 독립적인 국가로서 존재했던 발해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발해는 단순한 지방 정권이 아닌, 고유한 문화를 가진 엄연한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발해의 건국 과정은 민족의 저력과 부활 의지를 보여주며, 해동성국 시절의 번영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잠재력을 증명합니다. 비록 발해 멸망은 갑작스럽고 안타까웠지만, 그 유민들이 고려로 이어져 민족사의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부분입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북방을 호령했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대조영의 영웅적인 발해 건국부터 해동성국의 번영, 그리고 갑작스러운 발해 멸망과 그 이후까지, 발해의 228년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자긍심을 안겨줍니다. 비록 기록이 부족하여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발해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은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발해, 그 잊혀진 제국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300x250

관련글 더보기